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천국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교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천국잔치를 혼인잔치로 비유하셨다(마태복음 22:1~14). 혼인잔치가 열리기 위해서는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한다. 혼인잔치에서 신랑은 아들로 표현된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은 신부가 교회 또는 성도라고 주장을 하지만 마지막 천국잔치에서 성도들의 역할은 따로 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9:15)


성도들을 가리켜 혼인집 손님들이라 하였다. 어떤 결혼식에서 손님으로 불러놓고 신부 예복을 입혀 결혼을 시킨단 말인가? 그렇다면 천국 혼인잔치의 신부는 누구인가? 천국 혼인잔치가 열리는 순간을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계시로 기록하였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19:7~9)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예비된 아내와 복 받은 손님들을 예언하였다. 청함을 입은 복 받은 자들은 당연히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의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는 누구인가?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다. 하늘 예루살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 어머니라고 증거하였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우리 어머니다. 성경 구절을 찾아가며 살펴보았지만 어찌 보면 참 당연한 말씀이다. 우리 아버지의 아내는 당연히 우리 어머니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성령과 신부께서 온 세계를 향해 생명수를 받으라고 부르신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께 나아온 자들이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 입은 복받은 자들이다. 전 세계에서 성령과 신부이신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를 믿고 생명수를 받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가 유일하다.


하늘의 연리목 = 새언약 유월절



지난해, 제주도 한라생태숲에서 직경 60cm, 높이 8m의 크기로 수령은 약 100년으로 추정되는 연리목(連理木)이 발견됐다.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連理木)이라고 하는데 수명이 짧은 때죽나무가 수명이 긴 고로쇠나무에 살을 맞대고 엉겨 마치 한 나무처럼 보여 화제가 되었다. 때죽나무는 건강한 고로쇠나무 덕분에 함께 1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연리목은 옛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사랑 노래인 장한가(長恨歌)에 등장해 유명해졌는데, 우리 조상들은 연리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여겼다. 특히, 연리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에 비유되며, 나아가 부모와 자녀, 가족 간, 친구 간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종류지만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연리목. 한쪽의 생명력을 다른 쪽에 이어주는 사랑의 모습이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나온다면 생명력을 잃은 채 말라 비틀어져 불태워질 수밖에 없다. 반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는 포도나무이신 하늘 부모님과 가지로 표현된 자녀들의 관계를 나타낸 비유의 말씀이다. 자녀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늘 부모님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포도나무이신 하늘 부모님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한복음 6:53~56)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늘 부모님의 살과 피를 이어 받은 자녀들이 될 수 있다. 마치 연리목처럼 영원히 지치지 않는 생명력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은 오직 새 언약 유월절뿐이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5~20)


우리는 하늘 부모님의 사랑으로 약속한 유월절을 지킬 때,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하늘의 연리목이 될 것이다.

출처: 패스티브 닷컴

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1개의 진실<하나님의교회>



내가 믿고 있는 진실이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굳이 그런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이미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수많은 '진실'들은 사실 그 외피를 벗겨보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동안 우리가 진실로 포장된 수많은 거짓들에 철저히 속고 있었음을.


“빤한 거짓말 100개보다는 99개의 거짓말과 1개의 진실을 결합하면, 처음에는 그것을 부정하더라도 나중에는 그것을 믿게 된다. 사람들은 한 번 말한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 번 말하면 의심하고, 세 번 말하면 이내 그것을 믿어버린다.”


2차세계대전 당시 600만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오른팔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남긴 말이다. 나치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그는 TV, 라디오, 신문 등 대중매체를 이용해 대중들을 선동했다. 뛰어난 언변가였던 그는 언론을 장악하여 히틀러를 신격화시키고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말들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그것은 세뇌에 가까운 것이었다.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이 흘러나오고, 신문을 펼치면 나치를 미화하는 각종 선전문구와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는 활자들이 그대로 대중들에게 노출되었다. 그의 ‘선전’은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거짓말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대중들은 철저히 그의 거짓말에 세뇌되었다. 수없이 반복된 거짓은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졌고, 결국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의 목에는 어김없이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다. 길을 가다 보면 흔히 보이는 '교회'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들의 첨탑 위에도 십자가는 빠지지 않고 세워져 있다. 해마다 12월 25일이 되면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캐롤을 부르며 떠들썩하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부활절엔 교회에서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색칠한 달걀을 나누어준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풍경들이다. 교회의 꼭대기엔 당연히 십자가가 있고, 12월 25일은 당연히 아기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이며, 부활절에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달걀을 먹는 것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느껴지기에 '왜'라는 의문조차 떠올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십자가 숭배, 크리스마스, 부활절에 달걀을 먹는 풍습들은 사실 그럴듯해 보이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낸 거짓일 뿐이다. 


괴벨스의 말처럼 거짓말도 백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하나님의 계명이 변질된 이후로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거짓말은 반복, 또 반복되었다. 교회에는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는 거짓말,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일이라는 거짓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은 일요일이라는 거짓말, 이 외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수많은 거짓말들이 수세기를 걸쳐 전승되고, 끝없이 재생산되어왔다. 그토록 오랫동안 수많은 거짓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지배한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진실'로 여기게 된 것이다.


아무리 양의 탈을 썼다 할지라도 이리는 양이 될 수 없다. 제아무리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거짓은 거짓일 뿐이다. 이쯤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진실이라 믿어왔던 99개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99개의 거짓을 과감히 버리고 황망한 심정으로 1개의 진실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영생의처방전은 새언약 유월절



언젠가 숙명여대 최 모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처방된 7백 80만 건의 처방전을 분석하고 처방된 약의 16%에 해당하는 1백 32만 건이 안전규정을 무시한 잘못된 처방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최 교수에 따르면 특히 함께 복용할 경우 부작용이 우려되는 약물을 처방한 경우가 5천 4백 건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구발표로부터 3년 뒤 한 여성이 함께 먹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약물, 테르페나딘과 케토코나졸을 동시에 처방한 처방전으로 인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병원에서 처방전을 조제할 때 자동으로 함께 조제해서는 안 되는 약물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처방전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된 처방전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치유해야 하는 교회에서도 올바른 처방전을 버리고 잘못된 처방전으로 영혼들을 인도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유일하게 영적 의사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죄’라는 죽음의 병을 치료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영생의 처방전을 주셨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유월절 떡)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유월절 포도주)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새 언약이라는 최고의 처방전을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유월절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한복음 6:53~55)


예수님만이 우리 영혼을 치료할 영적 의사라고 믿는다면 그 처방에 따라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세상의 수많은 교회 중에 유월절 새 언약을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 외에는 없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325년 니케아 회의를 통해 유월절을 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도 없는 일요일 예배, 크리스마스 등을 들여와 지키고 있다. 이는 마치 올바른 처방전을 버리고 잘못된 처방전을 따르는 것과 같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을 해도 예수님의 새 언약이 아닌 다른 가르침으로는 우리 영혼에 아무 유익이 없다. 오히려 잘못된 고정관념이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해가 된다.


육적 처방전이든 영적 처방전이든 올바른 처방을 따라야 한다. 잘못된 처방은 약을 처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독을 처방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처방전을 왜곡하여 잘못된 처방을 따르도록 한다면 어떤 형벌을 받게 될까? 그리고 잘못된 처방을 따른 사람들의 영혼은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일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9)



안상홍님은 재림 예수님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님을 재림 예수님이라고 믿는다. 성경이 이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다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안상홍님을 재림 예수님이 아닌, 선지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안상홍님께서는 당신이 재림 예수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따라서 안상홍님을 재림 예수님이라고 믿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안상홍님께서는 운명하시기 4년 전, 한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셨다. 해당 기사 중 일부다.


“동 교회(하나님의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시기가 현재라고 믿고 있으며 재림할 때는 육체를 가지고 탄생한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옥체로 오셔야 할 이유로 ‘초림 예수 때 세워놓은 새 언약이 암흑세기 동안에 짓밟혔으므로 새 언약, 생명의 진리를 회복키 위해서 주님이 친히 오셔야 하고 백성과 진리를 찾아내시기 위해 다시 오셔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암행어사로 이 땅에 오셔서 37년간 복음사업을 하다가 죽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37년간 복음사업을 펴야 할 이유는 다윗의 왕위가 40년인데 초림 예수님은 3년간밖에 일을 못하고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재림 예수님은 40년을 채우기 위해서 37년간 복음사업을 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유월절만찬에서 예수님이 말한 새 언약을 중요시 한다. 새 언약의 만찬으로 주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는 주님의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초림 시에도 일반교인들이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마지막 암행 시에도 더욱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암행으로 오셔서 선지자의 역할을 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진리로 인도하시고 멸망받을 백성들에게는 친히 나타나셔서 예고의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빼앗겼던 생명의 진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세상 끝날에 다시 육체로 탄생하여야 한다.” (주간종교, 1981년 3월 18일자)


요약하자면 재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40년 통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오셔서 37년간 복음사업을 하셔야 한다. 또한 재림 예수님의 확실한 증표인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안상홍님께서 증거하신 재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을 과연 누가 이루셨겠는가. 바로 안상홍님 자신이셨다. 안상홍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대로 1948년 침례를 받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또한 재림 예수님만이 가지고 오실 수 있는 증표인 새 언약 유월절을 알려주셨다. 누구도 알려주지 못했던 새 언약 진리를 안상홍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37년 복음사업을 하신 후 1985년 승천하셨다. 안상홍님께서 증거하신 재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안상홍님께서 당신이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재림 예수님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하신 것이다. 아직도 안상홍님을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로 아는가. 만약 사도 베드로가 이 시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안상홍님은 두 번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안식일인 토요일로 유턴 = 천국간다<하나님의교회>



중국 어느 마을에 훌륭한 말이 이끄는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는 치장을 멋드러지게 해놓아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값어치가 나가 보였다. 말은 아주 빨랐으며 마차는 화려했다. 마을을 지나다 말고 마차를 멈춘 마차 주인은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옆에서 말과 마차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이 마차 주인에게 훌륭한 말과 마차를 가졌음을 부러워했다. 주인 역시 자신의 말과 마차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우쭐거렸다.


마을 사람이 목적지를 묻자 마차 주인은 초나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은 초나라를 가려면 지금 오는 방향의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당신은 지금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마차 주인은 엉뚱하게도 계속 훌륭한 말과 마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문제없다고 했다. 마을 사람이 그래도 초나라는 북쪽이라고 하자 마차 주인은 여비가 많이 있으니 걱정없다고 했다. 마을 사람의 계속된 충고에도 마차 주인은 상관없다며 유유히 남쪽을 향해 마차를 끌고 떠났다.


아무리 빠른 명마와 보기 좋은 마차를 가지고 있다 해도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목적지가 있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명마와 훌륭한 마차를 가지고 있고, 시간이 많고, 돈이 많다 할지라도 초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
남쪽으로 가면 목적지와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영생, 즉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기 위해서다.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천국을 향한 길로 가야 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에스겔 20:12~13)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7~9)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향하는 길로 안식일을 주셨다. 안식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표징을 삼아주셨고, 지키면 살 수 있는 안식일 규례로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천국 가는 길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일요일 예배를 보고 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의 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 계시는 천국과는 멀어진다고 하셨다. 아무리 훌륭한 말과 마차를 가지고 있다 해도 남쪽으로 향한다면 절대 북쪽 초나라로 갈 수 없다. 오히려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북쪽으로 향해야 결국엔 초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크고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국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운명의 U턴.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꿔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달려보지 않겠는가.

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아니다<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에서는 교회의 상징이라 말하는 십자가를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분명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은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교회 상징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이며 구원주시려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희생하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성경대로 우상인 십자가를 세우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인 새언약 유월절을 지킴으로 있습니다.

출 20:4 너를 위하여 생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기독교에 대한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콘스탄틴 시대부터였습니다.
기독교가 이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교의 상징물을 세우고 섬겼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인 십자가를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세우지 않습니다.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하나님의 뜻인 여성도들의 수건규례<하나님의교회>



예수님께서는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머리에 무엇인가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거나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게 되면 그 머리 되시는 하나님을 옥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을 통해 여성도들은 반드시 예배나 시도시 머리수건을          써야 한다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그토록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라고 말하면서까지
머리수건 규례를 강조했던 것일까요?

이는 작게 보이는 머리수건 규례 하나조차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
향하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과 멸망의 판결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여성도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의 절기의 날이 없다면(유월절,안식일)

3월 1일. 그날이면 우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기립니다. 그들은 일제의 총과 칼 앞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매년 3월 1일 자주독립에 대한 정신을 우리들에게 심어줬습니다.


7월 17일. 그날이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의 제정을 온 국민이 축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헌법수호를 다짐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합니다.


8월 15일. 그날이면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을 축하합니다. 광복, 말 그대로 우리는 이날 빛을 되찾았습니다.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밖에도 현충일, 한글날 등 다양한 국경일이 존재합니다. 그날이 되면 온 국민은 국기를 게양하거나 그날이 존재하는 의미를 생각합니다. 만약 그날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을까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독립운동가의 정신도, 나라의 소중함도, 헌법과 민주주의 중요성도 어느새 잊었을 겁니다. 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기틀이 되는 정신, 그것을 잊는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늘 본향을 되찾는 길도 동일합니다. 매주 일곱째 날 안식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켜야만 거룩함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애굽기 31:13)


성력 1월 14일 저녁 유월절.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통해 자녀들에게 죄 사함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희생과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죄 사함의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무교절 후 첫 안식일 이튿날 부활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자녀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린도전서 15:19~21)


그날이 없다면 우리는 안식의 축복도, 죄 사함도, 부활의 소망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은 결코 천국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없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과 뜻이 그날 안에 들어 있고, 그날을 기념하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패스티브 닷컴

2013년 10월 7일 월요일

생명을 갖게하는 새언약 유월절<하나님의교회>

뽀로로, 루피, 에디, 포비, 크롱.

EBS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크게 사랑받는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어느 숲속 마을에 살고 있는 여러 동물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통해 아이들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인공인 펭귄 뽀로로는 ‘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에 힘입어 뽀로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인형은 물론 가방, 의류, 식기류, 문구류 등의 다채로운 어린이용품으로 제작되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뽀로로에 나오는 친구들에게 생명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더 이상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 생태계 먹이사슬에 의해 펭귄인 뽀로로는 여우과인 에디에게 잡아 먹히게 될 것이다. 또 여우인 에디와 비버인 루피는 백곰인 포비에게 잡아 먹힌다. 하지만 포비 역시 아기공룡 크롱이 자라면 크롱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생명이 없는 만화 속 주인공으로 있을 때는 귀여운 말썽쟁이 크롱, 의젓하고 마음씨 좋은 포비지만, 생명을 가진 공룡 크롱과 곰 포비의 힘은 실로 강하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이는 결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만은 아니다. 현실에서 크롱과 포비가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상태에서도 이 논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크롱과 포비는 강한 존재지만 만화 속 크롱과 포비, 죽은 크롱과 포비는 아무런 힘이 없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생명을 갖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요한복음 6:53~54)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5~20)


유월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과 피를 물려받은 자들은 생명을 갖게 된다. 반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리고 생명 있는 자가 생명이 없는 자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많은 교인이 등록되어 있고, 웅장한 교회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그저 만화 속 크롱과 포비, 죽어 있는 공룡과 곰일 뿐이다.

생명을 갖게하는 유월절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출처 : 패스티브 닷컴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성령의 이름은??



오늘날 복잡한 사회조직에서는 여러 가지 직함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회장, 상무, 과장, 동창회장, 산악회장 등의 직함으로 자신의 권위나 역할 또는 관심분야를 나타낸다. 흔히 사용하는 명함에도 성함뿐만 아니라 소속, 직함, 주소, 연락처 등을 표기하여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직체의 호칭 가운데 직함과 성함을 구별하지 않아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 중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직함과 성함을 구별하지 않고 있어 혼란이 야기될 뿐만 아니라 황당해질 때가 있다.


예컨대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했을 때 ‘대통령’은 ‘직함’이고, ‘이승만’은 ‘성함’에 해당한다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직함에 해당한다. 성부 여호와, 성자 예수는 직함과 성함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며 성령의 이름은 미지수로 남아 있었다.


성령을 헬라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보혜사(保惠師), 대언자 외에도 상담자, 중재자, 변호자, 옹호자의 의미를 가진 말로써 직함일 뿐 결코 성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 보혜사를 성함으로 혼동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성령도 직함이요 보혜사도 직함일 뿐 성함이 아니다.


그런데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령이 직함이든 성함이든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이 영어로는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이다. 이 문장을 원문에 가깝게 직역을 하면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오랜 세월 미지수로 남아 있는 문제가 바로 성령의 이름이다. 성부의 이름은 여호와, 성자의 이름은 예수다. 그렇다면 성령의 이름은 무엇일까? 더 큰 문제는 성령의 이름을 솔직하게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목사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이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고백할 용기가 왜 없을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Know yourself!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당시 지식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모함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다가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무지한 인생들에게 이단이라는 모함을 당하더라도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 천국에 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성령의 이름은?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예수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예수님)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벌거벗은 임금은 누구? = 거짓 교인들<새언약 안식일>



왕이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나체로 거리를 행진하는 동화 속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1837년 작 안데르센의 작품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원제는 ‘황제의 새로운 옷’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랏일보다 옷에 관심이 많은 임금이 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두 재단사가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임금은 기뻐하며 그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며 옷을 만들어 오라고 시킨다. 그런데 재단사는 그 옷감은 ‘구제불능의 바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고 못박아 두었다.


시간이 흘러 어떤 멋진 옷이 탄생될지 매우 궁금한 임금은 신하들을 시켜 재단사가 작업하는 것을 보고 오라고 명했다. 신하의 눈에 분명 옷은 보이지 않았고 재단사들은 허공에서 옷을 만드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하는 자신이 바보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아 옷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후 다른 신하들도 같은 이유로 옷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임금 역시 옷이 안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옷이 보인다고 했으니 자기만 안 보인다고 하면 바보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두려워 임금도 아름다운 옷이라고 극찬한다. 그리고 임금은 재단사들에 의해 옷을 입는다. 물론 재단사들은 입히는 시늉만 했고, 임금도 장단 맞춰 입는 시늉만 했다.


옷을 입은 임금은 거리 행차를 나가게 된다. 사실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신하, 모든 이들의 눈에 옷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기들도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 차마 그 사실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꼬마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소리치면서 드디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임금은 정말 옷이 없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재단사의 말에 속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옷을 입었던(?) 임금의 모습은 오늘날 일부 기성교인들과 닮았다. 성경에 일요일예배는 분명 보이지 않는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성경에 일요일예배는 없다. 그런데 기성교인들은 없는 일요일예배를 있는 것처럼 지키고 있다. 왜 그럴까. 이 교회의 목사나 저 교회의 목사나 ‘일요일이 거룩한 예배일’이라고 못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옷이 보이지 않지만 진실을 얘기하면 바보라고 몰릴까 두려워했던 백성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성경의 예배일은 분명 ‘안식일’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태복음 12:8)


예수께서 ···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누가복음 4:16) 


언제까지 목사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장단을 맞춰줄 것인가. 이제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동화 속 아이처럼 말해보라. “성경에 일요일예배는 없다!”라고.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1서 2:3~4)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가장 지혜를 일깨우는 성경<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경을 허락하신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헤를 일깨우며 구원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구원주시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니 하나님을 찾는 이도 없고 올바로 알아보는 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돈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남자의 형상을 지니신 하나님과
여자의 형상을 지니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의 형상을 지니신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형상을 지니신 하나님은 당연히 어머니 하나님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성경의 증거따라 하나님의교회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일깨워주는 생명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으세요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하나님의 원리 원칙은 ?/<새언약 유월절>

오대양 사건, 다미선교회 사건, 영생교 사건, 옴진리교 독가스 테러사건. 사이비종교집단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흔히 사이비라고 하면 진리에서 벗어난 맹목적인 신앙을 고집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이비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사이비는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과 논어(論語)의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에게 제자가 물었다. “향원(鄕原)을 모든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데 유독 공자만 그를 덕을 해치는 사람 즉, 사이비(似而非)라고 비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맹자의 대답이다. “공자가 말하길 ‘나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라고 하셨다. 사이비는, 외모는 그럴듯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즉 겉과 속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며, 선량해 보이지만 실은 질이 좋지 못하다. 공자가 사이비를 미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 이처럼 공자는 인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처세술에 능한 사이비를 덕을 해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다. 원리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 법이다.”


이처럼 사이비는, 외모는 그럴듯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또 원리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활개를 친다. 유독 현대사회 들어 사이비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면 죄 사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원리 원칙인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분부하신 유월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말씀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일까.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되레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을 사이비라고 비난한다. 적반하장이다. 원리 원칙과 상식이 없다는 의미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사람의 계명’ 곧 크리스마스나 일요일 예배,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자들이야말로 사이비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7~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하나님께서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하신다.

출처: 패스티브 닷컴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영생주시는 어머니 하나님



사랑과 생명을 떠올리면 어머니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이와같이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를 통해 생명을 이어 받습니다.
또한 미물들도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지극한 모성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어머니를 통해 생명을 탄생하도록 만물을 창조하셨을까요?

천지만물을 뜻을 두고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생명탄생의 이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되는 과정과 어머니 하나님의 지고하신 성품을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어머니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어머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2013년 10월 2일 수요일

엘로림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수 천녀 동안 성경학자들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 엘로힘 하나님
히브리어 엘로힘은 하나님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신데 왜 성경에는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남자는 아버지 하나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또한 여자는 어머니 하나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또한 성령시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

결혼식이나 여행 등 일요일에 날을 잡으면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일성수(主日聖守)를 신앙의 첫 번째 덕목으로 삼으며,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지킨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가상하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 성경대로라면 예배의 날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어야 한다. ‘주일’을 운운하는 그들이 인용하는 말씀이 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요한계시록 1:10) 


그들은 일요일 예배가 성경에 한 구절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을 ‘주일’이라고 우긴다. 과연 ‘주의 날’은 언제일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태복음 12:8, 마가복음 2:28, 누가복음 6:5)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주의 날(主日)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만인이 알다시피 토요일이다. 아주 단순한 문제다. 하나님께서 토요일에 예배하라고 하셨으면 토요일에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다. 왜 굳이 일요일을 따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가 말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넷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단 한 번도 일요일을 가리켜 ‘나의 날’이라고 하신 적이 없다. 기억하라. 안식일이 주의 날이다.